박노학 (1914.6. ~ 1988.3.) 전 사할린억류귀환한국인회 회장
| 1928년, 경남 함양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박병헌은 1939년 12살이 되던 해 형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제강점기의 억압 속, 타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다른 언어와 생활에 적응한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정체성을 지키고, 민족을 잊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었다. 그는 도쿄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후 공장에서 일하며 어렵게 전문학교를 다녔다. 해방 직후, 재일동포 청년 단체였던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활동을 시작으로 민족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이 선택은 곧 그를 재일동포 사회 리더의 자리로 이끄는 분수령이 됐다. |
1.사할린 동포의 편지 배달부
1945년 해방 이후, 사할린에 억류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구소련 치하에서 장기간 고립됐다. 일본 제국의 패망과 함께 행정력은 사라졌고, 구소련의 통제는 강해졌으며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모국과의 연락은 사실상 단절됐다. 이 과정에서 수천 명의 조선인은 가족과 연락이 끊긴 채 수십 년을 보내야 했으며,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박노학은 사할린 동포와 본국 가족을 연결하는 민간 전달자의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일본에 정착한 그는 사할린에 남겨진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편지 속에는 ‘내 가족에게 이 편지를 꼭 전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있었다. 당시 한국은 구소련과 미수교국이어서 사할린 동포는 한국의 가족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박노학이 사실상 유일한 중개자이자 전달자였다.
사할린 동포들 사이에 "박노학에게 부탁하면 가족을 찾아준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에게 수백 통의 편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편지는 삼각 구조 형태로 가족에게 전달됐다. 사할린 동포가 일본에 있는 박노학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는 이 편지를 다시 한국의 아들 박창규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아들은 주소지나 실제 거주지가 다른 경우 시청, 읍·면·동사무소 등을 직접 방문해 현재 사는 곳을 찾아 발송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편지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박창규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박노학은 국내 활동가 한영상, 이두훈 등과 협력해 대구에 ‘화태억류교포귀환촉진회’(후일 ‘중소이산가족회’) 결성을 주도했다. 이 단체는 사할린 동포의 편지를 수신자에게 전달하고, 답신을 다시 박노학에게 보내주는 공식 채널이 됐으며, 단체 명의로 정부와 적십자사 등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박노학은 단순히 우편으로만 편지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 국내로 일시 귀국하는 경우에는 사할린에서 받은 편지를 직접 한국의 가족들에게 전달했다. 그의 아들 박창규는 사전에 연락을 취해 해당 가족이 서울로 와서 박노학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고, 가족들은 전국 각지에서 박노학의 집으로 모여 남편, 아버지, 형제로부터 온 편지를 받아보고 그로부터 생생한 근황을 전해 들었다.
좁은 방 안에 모여 편지를 읽고 부둥켜안고 우는 가족들, 답장을 쓰기 위해 어쩔 줄 몰라 하던 어머니들, 말은 하지 못해도 눈물로 감사 인사를 전하는 모습들이 반복됐다. 이러한 전달 현장은 해방 이후 최초의 생사 확인이자, 이산의 고통을 위로하는 치유의 과정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전달한 편지는 3만 여통에 달한다.

사할린 동포들이 박노학 선생에게 보낸 편지와 이를 바탕으로 작성된 명부
(출처 : 국가기록원)
2. 일본에서의 ‘사할린 동포 귀환운동’과 ‘박노학 명부’
그는 사할린 동포의 실체와 귀환의 염원을 입증하는 데 이 편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리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이를 명부화했는데, ‘박노학 명부’라 불리며 약 7천 명의 귀국 희망자가 수록돼 있다. 이 명부에는 국적·지역·귀국 희망 형태까지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이 명부는 한국 정부에 전달됐고, 한국 정부는 이를 일본 정부에 전달하면서 사할린 동포 귀환에 관한 구소련과의 협상에 나서도록 했다. 이후 ‘박노학 명부’는 귀환을 희망하는 사할린 동포의 존재를 부인하던 구소련의 입장을 반박하는 중요한 증거이자 일본과 한국의 정부 및 국민들에게 사할린 동포의 귀환 의지를 널리 알리고 국제사회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1980년대 후반 사할린 동포들의 일본과 한국으로의 일시방문 및 영주귀국을 추진하는 대상을 우선적으로 입증하고 선별하는 기준이자 강제동원 피해를 규명하는 소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박노학 선생이 작성한 귀환희망자 명부
(출처 : 국가기록원)
3. 사할린 동포의 가족 상봉과 모국 방문 실현
박노학은 1958년 일본에 정착한 뒤부터 사할린 동포들의 귀환 운동을 주도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영주귀국은 구소련과 일본, 한국의 외교 협상이 전제돼야 하는 일이었고, 당장 실현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노학은 보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가족과의 일시 상봉을 구상했다. 이는 사할린에 있는 동포들이 짧은 기간이라도 일본이나 한국에서 가족을 만나는 방식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정치적 부담이 크지 않으면서도 실질적 효과를 낼 수 있는 ‘인도적 접근’이었다.
1983년 그와 평소 교류를 이어온 일본의 정치인이 위령성묘단의 일원으로 사할린을 방문했을 때 사할린 당국자를 만나 이 문제를 제기했고, 지속적인 설득 끝에 신뢰할 수 있는 일본인이 초청하는 경우 연 10명 정도 일본에서 가족과의 재회가 가능하다는 구소련 측의 답변을 이끌어 냈다. 이 소식을 들은 박노학은 초청 대상자 명단 선별, 일본 내 숙박 준비, 가족 연락 등 모든 실행을 준비했다. 드디어 1984년 9월, 사할린 동포 10명이 일본에 도착해 도쿄에서 한국 가족들과 역사적인 상봉을 했다. 이는 전후 최초의 사할린 동포 공식 출국 사례이며 실질적 귀환운동의 물꼬였다.
박노학의 집은 좁은 다다미방 하나였지만, 이 공간은 사할린 동포와 한국 가족들이 다시 만나는 눈물의 장소가 됐다. 그는 일본어 통역과 체류 지원은 물론, 상봉 일정과 교통까지 자비로 감당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온 가족도 그의 집에 머물며, 며칠간 떨어져 살았던 가족의 얼굴을 마주하고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장면들은 생존 확인, 그 자체의 기쁨이자 식민과 냉전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운 점이 있었다. 고령, 병환 등의 이유로 한국 가족이 일본으로 건너오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에 박노학은 사할린 동포가 일본 방문 중, 다시 한국으로 건너가 가족을 만나는 방식을 제안했다. 1987년, 일본 여야 의원 138명이 참여한 '사할린잔류 한국·조선인 문제 의원간담회'가 발족되면서 이 아이디어는 정치적 추진력을 얻었다. 그는 일본 정부가 보증인 제도와 비용 부담을 마련하고, 구소련 정부와의 협상에 이 안건을 제기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박노학이 간암으로 사망한 지 3개월 뒤인 1988년 6월, 의원단은 구소련을 공식 방문해 '일본 경유 모국 방문' 허용을 요청했고, 같은 해 9월 마침내 최초의 사례가 성사됐다.
박노학은 ‘귀환’이라는 거창한 명제를 ‘상봉’이라는 작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현실화시켰으며, 그의 노력은 오늘날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사업으로 발전하며 결실을 맺었다.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려 우리 정부는 1988년 그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