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기 (1934.6. ~ 2021.8.) 前 M&L Hong 재단 이사장
| 홍명기는 1954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캘리포니아대 로스앤젤레스(UCLA)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콜로라도 농장과 베벌리힐스의 한 가정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지만,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졸업 후 그는 철강 외장 코팅재료를 개발하는 회사에 연구원으로 취직하며 본격적으로 화학 도료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이후 항공기 및 자동차 마감재를 개발하는 연구소와 철강 코팅 원료를 연구하는 기업에서 일하며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타민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승진에서 배제되는 경험을 하게 된 그는 결국 1986년 51살의 늦은 나이에 독립을 결심하고 ‘듀라코트’(Dura Coat)를 창업했다. 자본금 2만 달러로 시작한 회사는 로스앤젤레스 인근 화학회사 모퉁이에 설치된 작은 컨테이너 사무실에서 문을 열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새로운 도료 개발에 주력했고, 건축 자재와 상용차 코팅, 전자제품 외장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되는 특수 페인트를 생산하며 미국 내 시장점유율 1위, 연매출 3억 달러를 기록하는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사업가로서의 성공을 거둔 그는 1992년 LA 폭동을 계기로 한인사회를 위한 활동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 미주 한인들은 폭동으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당시 현장을 방문한 미국 대통령에게 억울한 사정을 설명한 그는 한인 정치인이 없음을 목격하고 미주 한인들이 자긍심을 갖고 주류사회에서 인정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돕겠다고 결심했다.
한인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그는 사재 1천만 달러를 희사해 2001년 밝은미래재단(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딴 ‘M&L Hong 재단’의 전신)을 설립했고, 차세대 한인 지도자 육성과 사회복지 사업, 한인 권익 향상 등에 매진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의회는 2022년 ‘홍명기의 날’ 제정 결의안에 그가 재단 설립 기금 1천만 달러 외에도 한국, 미국 등에서 차세대 한인 육성, 장학 및 사회 복지 사업 등에 1천200만 달러의 기부 활동을 펼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1. 한인 차세대 교육 및 장학 사업
홍명기는 한인 차세대 교육이 가장 중요한 투자라고 믿었으며, 이를 위해 다양한 장학 및 교육 지원 사업을 펼쳤다. 2000년 미주 유일의 민족교육 기관이자 정규 초등교육 기관인 남가주한국학원이 오랜 재정 적자 누적으로 폐교 위기에 처하자 학원 이사장을 맡아 불철주야 모금 운동을 전개했고, 20만 달러의 본인 기부금을 포함해 300만 달러의 기금을 모아 부채를 상환해 학교 운영을 정상화했다.
홍명기는 또한 국내외 대학에 후학 양성을 위한 기부 활동도 펼쳤다. 국내에서는 2014년 삼육대학교 발전기금으로 100만달러를 쾌척했고, 이후 꾸준히 화학과 및 생명과학과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지급했다. 2017년 모교인 UCLA에 200만 달러를 기부해 2개의 석좌교수직 설치를 지원하는 한편, LA 동부 라시에라 대학에 화학 연구동 신축을 위해 100만 달러를 내놨다.
그밖에도 그는 전 세계 한상들이 차세대 인재 육성을 위해 설립한 공익 법인 ‘글로벌한상드림’의 이사장을 맡아 10만달러를 솔선수범 기부해 장학 사업과 사회공헌 활동을 펼쳤고, 탈북민 및 다문화 가정 자녀에게 꾸준히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청년들을 지원함으로써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였다.
2. 독립운동 역사 보존 및 정신 계승
홍명기는 LA 이주 후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내 헬렌 안의 집에서 열린 흥사단 모임에 참석하며 도산 선생의 가르침을 제대로 배우게 된다. 도산 선생은 초기 미주 한인들에게 “미국사회에 살아가려면 정직과 성실을 바탕으로 신뢰를 쌓아야 주류사회에서 한국 사람을 서로 믿을 수 있다”며 한국인에 대한 미국인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한국 유학생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이러한 도산의 가르침을 공유해 민족정신 함양과 역사적 자긍심 고양에 힘썼다.
① 도산 안창호 기념 동상 건립 (2001년)
1999년 ‘미주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총회장을 맡게 된 그는 도산 선생의 가르침을 미주 한인들이 계승할 수 있도록 리버사이드 시청 앞 광장에 동상 건립을 추진했다. 리버사이드는 1904년 도산 선생이 오렌지 농장에서 동포들과 함께 일하며 독립 의지와 정신을 몸소 실천했던 해외독립운동의 뿌리가 되는 곳이었다. 자신의 기부금 15만 달러와 재미동포 기부금, 우리 정부 지원금 등 약 60만 달러를 모아 2001년 8월 리버사이드 시청 앞 공원(40평 부지)에 -마틴 루터 킹 목사 동상 맞은 편- 안창호 선생 동상을 세웠다. 이 동상은 한인 학생들이 단체로 견학하는 정체성과 뿌리 교육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② ‘도산 안창호 인터체인지(IC)’ 지정 (2002년)
홍명기는 안창호 선생의 주 활동지였던 리버사이드로 연결되는 LA 10번·110번 고속도로 IC를 ‘도산 안창호 IC’로 명명하는 사업을 제안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 협의와 주의회 결의를 통해 미국에서 가장 혼잡한 도로로 꼽히는 동 IC 4곳에 그가 후원한 도로 표지판이 설치됐고, 이로써 한인 위상이 한층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
③ 대한인국민회관 복원 (2003년)
1909년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대한인국민회관’이 2003년 노후화로 철거 위기에 놓이자 복원사업회장을 맡아 보존 운동을 주도했다. 대한인국민회관은 1909년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활용됐던 역사적인 건물로, 이를 보존하기 위해 우선 사재를 털어 모범을 보이고, 동포 사회와 한국 정부의 후원을 이끌어내 총 70만 달러의 복원 기금을 마련했다. 이로 인해 대한인국민회관은 미주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이자 한인 이민 역사 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3. 미주 한인사회 영향력 확대 지원
미주 한인 이민 역사, 한인사회 발전 방안 등에 관한 학술 연구의 필요성을 느낀 홍명기는 2018년 미국 내 최초로 한국인 이름이 붙여진 대학 산하 연구소인 UC 리버사이드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에 37만 달러를 내놨다. 이 연구소는 우리 정부와 대학 측이 각각 300만 달러, 미주동포사회 기부금 300만 달러를 모금해 2010년 문을 열었다. 구술 역사 기록, 도서 출판, 논문과 신문 기고 등의 활동을 통해 미주 한인 이민사 기록‧보존 및 미주 한인의 역할 연구 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김영옥 (1919~2005)
ㅇ 191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독립운동가 김순권의 아들로 태어난 김영옥은 22살이 되던 1941년 미 육군 장교 소위로 임관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큰 활약을 펼쳤고,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제대했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 입대해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으로 와 대대장으로서 유엔군 3차 반격의 견인차 역할을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중 직접 고아원을 세워 전쟁고아들을 지원했다.
ㅇ 휴전 후에도 한국군 군사 고문 활동과 한국군 전시 동원 계획에 대한 개편 작업을 이끌며 국군 최초 미사일 부대 창설 등의 업적을 이뤘다. 김영옥은 1972년 육군 대령으로 전역 후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등을 세우는 데 공헌하는 등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원에 힘썼다. 이러한 김영옥의 업적을 기려 미국 로스앤젤레스 교육위원회는 2009년 그의 이름을 딴 공립학교 ‘김영옥중학교’를 설립했고, 한국,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최고무공훈장을 받았다. |
그밖에도 그는 미 의회에 한인 정치인을 배출하는 것이 재미동포사회의 위상 제고에 도움이 될 것이라 믿고 차세대 지도자 육성과 한인 정치력 신장을 위해서도 적극적으로 재정 지원을 펼쳐 미국 내 다수의 한인 정치인 배출에 기여했다.
세계한상대회(현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 창립 멤버이기도 했던 홍 이사장은 2013년 제12차 대회의 대회장과 리딩 CEO 의장 등을 맡아 세계 한상 네트워크 발전에도 큰 족적을 남겼으며, 타계 직전인 2021년 초 재외동포교육문화센터 건립용지 대금으로 5억원을 기부하는 등 최근까지도 모국과 동포사회에 대한 기여를 이어왔다.
우리 정부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해 그에게 2002년 국민훈장 동백장 및 201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 주 의회는 2022년 그의 생일인 6월 20일을 ‘홍명기의 날’로 제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