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재일동포 권익 향상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오사카 민단에 연 500만 엔씩을 찬조했고, 1970년 오사카 엑스포 개최 당시 한국관 건립을 위해 거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또한, 6.25 전쟁에 참전한 642명의 재일동포 학도 의용군들의 조국애를 기리기 위한 재일학도의용군참전기념탑(인천 수봉공원) 건립시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에 3000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재외동포 모국 투자의 선구자
서갑호 회장의 모국 투자는 1961년 박정희 전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 계획을 펼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서갑호 회장의 모국 투자는 한국 섬유 산업의 발전과 수출국의 초석을 다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그은 1963년 2월 영등포 소재 한국 최대 면직공장인 ‘태창방직’을 100만 달러에 인수하여 서울 문래동 일대에 ‘판본방직주식회사’를 설립했고, 4년뒤 ‘방림방적’으로 사명을 바꿨다. 그의 이러한 투자는 재일동포의 최초의 대규모 모국 투자로,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키며 화제의 인물이 됐다.
그는 1970년대 접어들며 모국에서의 사업 확장을 모색하면서 1973년 구미에 약 7000만 달러를 투자하여 ‘윤성방적’을 설립했고, 최첨단 면방기계와 최신식 방적기를 설치해 그해 9월부터 공장 가동을 시작했다. 방림방적과 윤성방적의 고용인력만 4000명, 그중 다수는 젊은 여공으로, 이들을 위해 방림방적 공장 내부에 ‘방림여고’를 세워 교육기자재 및 수업료를 지원하며 학업을 이어갈 기회를 제공해 주기도 했다. 어려웠던 이 시절에도 한국 및 일본의 그의 공장은 충실한 식사제공으로 유명했다. 식당을 회사 중심부에 두고 모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서갑호 회장 자신도 하루 한 번 식당에 들러 식사하는 것이 그의 일과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74년 1월 ‘윤성방적’ 공장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며 그의 사업은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당시 피해 규모는 143억 상당으로, 2만여 평의 공장이 불에 타 방적기 약 13만 4700추, 원면 435톤 등이 불타 없어졌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1차 석유 파동으로 인한 경기침체와 원유 가격 폭등으로 방직 사업의 수익성은 점점 악화됐다. 결국 1974년 ‘사카모토방적’ 은 어음 3억엔을 막지 못해 640억엔의 부도를 내고 도산했다. ‘사카모토방적’의 도산은 한국의 ‘방림방적’ 및 ‘윤성방적’에도 영향을 미처 은행들의 융자금 회수가 잇따르며 보유 자산을 대거 매각하게 됐고, 사업을 축소 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