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의 이의경 지사에 대한 판결문
(출처 : 국가기록원)
해외에서도 이어진 독립운동의 의지
상하이로 피신한 그는 1919년 11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창립한 보건 후생 단체 대한적십자회의 대원이 됐다. 의학도였던 그는 간호사 양성 업무를 맡았는데 마침 상하이에 머물고 있던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고, 안 의사의 사촌동생 안봉근과 함께 유럽으로 건너가 망명 생활을 이어갔다.
프랑스 마르세유를 거쳐 독일 뷔르츠부르크에 간 이 지사는 뮌스터 슈바르차하 수도원에 머물며 독일어를 익혔다. 수도원의 도움으로 뷔르츠부르크대학교에서 의학 공부를 이어가던 그는 1925년 뮌헨대학교로 옮겨 동물학과 철학으로 전공을 바꿔 공부를 지속했다.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세계피압박민족회의’가 열리자 그는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하고 있던 이극로, 황우일 선생과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있던 김법린 선생 등과 함께 한국 대표단을 조직해 참가했다. 이들은 회의 주최 측에 첫째, 시모노세키조약(1894년 청일전쟁 이후 체결된 조약)을 실행해 조선의 독립을 확보할 것 둘째, 조선 총독 정치를 즉시 철폐할 것 셋째,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의제로 제안했다. 또한 결의문 ‘한국의 문제’(The Korean Problem)의 초안을 작성하고, 결의문을 독일어, 불어, 영어로 번역해 소책자로 만들어 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들에게 배포해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