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임

 

 8 이달의 재외동포 (이의경, ※필명 : 이미륵)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의경.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828pixel, 세로 846pixel

 

이의경 (1899.3.-1950.3.)

독립운동가

 

 

이의경 지사는 189938일 황해도 해주의 한 가정에서 세 누이를 둔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필명 ‘미륵’은 어머니가 미륵불의 은덕으로 점지받은 아들이라며 부른 그의 아명이었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고 열 살 무렵에는 사서삼경과 통감 전권을 읽을 정도로 영민했다. 이 지사가 해주보통학교를 다니던 1910, 조선이 일본에 강제 병합됐다.

 

 

조국을 위한 투쟁

 

1919년 그가 경성의학전문학교(현재 서울대 의대) 3학년 새 학기 준비에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무렵 3.1운동이 일어났다. ‘조선독립신문’ 제1호가 독립선언서와 함께 서울거리에 배포되자 그는 경성의전 친구들과 함께 주저 없이 만세 시위에 뛰어들었다. 탑골공원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는 시민들과 폭력으로 진압하는 일본 경찰들의 대립을 목격한 그는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 지사는 19195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국내 상황을 공유하고, 독립운동자금 모집 및 전달, 각종 인쇄물을 작성‧배포해 독립 여론 조성 등을 목적으로 하는 ‘대한청년외교단’이 결성되자, 편집부장을 맡아 ‘외교시보’(外交時報) 등 선전물의 발간을 주도했다.

 

또 같은 해 829일 거행된 ‘제2회 독립만세시위’에서 사용됐던 ‘국치기념경고문’ 300매를 인쇄해 배포했다. 이러한 비밀 활동이 경찰에 누설되고 동지들이 체포되면서 조직이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이 지사도 경찰의 체포 대상이 됐으나, 어머니와 주변 지인들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피신할 수 있었다. 일본은 대한청년외교단 관련자들을 기소했고, 19205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형을 선고했다. 그 역시 궐석재판이지만 재판을 받아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