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여전히 아쉬운 점이 있었다. 고령, 병환 등의 이유로 한국 가족이 일본으로 건너오는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에 박노학은 사할린 동포가 일본 방문 중, 다시 한국으로 건너가 가족을 만나는 방식을 제안했다. 1987, 일본 여야 의원 138명이 참여한 '사할린잔류 한국·조선인 문제 의원간담회'가 발족되면서 이 아이디어는 정치적 추진력을 얻었다. 그는 일본 정부가 보증인 제도와 비용 부담을 마련하고, 구소련 정부와의 협상에 이 안건을 제기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박노학이 간암으로 사망한 지 3개월 뒤인 19886, 의원단은 구소련을 공식 방문해 '일본 경유 모국 방문' 허용을 요청했고, 같은 해 9월 마침내 최초의 사례가 성사됐다.

 

박노학은 ‘귀환’이라는 거창한 명제를 ‘상봉’이라는 작고 구체적인 실천으로 현실화시켰으며, 그의 노력은 오늘날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사업으로 발전하며 결실을 맺었다.

 

이러한 그의 공적을 기려 우리 정부는 1988그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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