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박노학 선생이 작성한 귀환희망자 명부 (출처 : 국가기록원) |
사할린 동포의 가족 상봉과 모국 방문 실현
박노학은 1958년 일본에 정착한 뒤부터 사할린 동포들의 귀환 운동을 주도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영주귀국은 구소련과 일본, 한국의 외교 협상이 전제돼야 하는 일이었고, 당장 실현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노학은 보다 ‘현실적인 대안’으로 가족과의 일시 상봉을 구상했다. 이는 사할린에 있는 동포들이 짧은 기간이라도 일본이나 한국에서 가족을 만나는 방식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정치적 부담이 크지 않으면서도 실질적 효과를 낼 수 있는 ‘인도적 접근’이었다.
1983년 그와 평소 교류를 이어온 일본의 정치인이 위령성묘단의 일원으로 사할린을 방문했을 때 사할린 당국자를 만나 이 문제를 제기했고, 지속적인 설득 끝에 신뢰할 수 있는 일본인이 초청하는 경우 연 10명 정도 일본에서 가족과의 재회가 가능하다는 구소련 측의 답변을 이끌어 냈다. 이 소식을 들은 박노학은 초청 대상자 명단 선별, 일본 내 숙박 준비, 가족 연락 등 모든 실행을 준비했다. 드디어 1984년 9월, 사할린 동포 10명이 일본에 도착해 도쿄에서 한국 가족들과 역사적인 상봉을 했다. 이는 전후 최초의 사할린 동포 공식 출국 사례이며 실질적 귀환운동의 물꼬였다.
박노학의 집은 좁은 다다미방 하나였지만, 이 공간은 사할린 동포와 한국 가족들이 다시 만나는 눈물의 장소가 됐다. 그는 일본어 통역과 체류 지원은 물론, 상봉 일정과 교통까지 자비로 감당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온 가족도 그의 집에 머물며, 며칠간 떨어져 살았던 가족의 얼굴을 마주하고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그 장면들은 생존 확인, 그 자체의 기쁨이자 식민과 냉전의 상처를 조금씩 치유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