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일본으로 가는 배 안에서 탄원서를 써 도쿄에 도착한 직후 주일한국대표부를 찾아가 이를 제출했다. 또한 사할린 동포 귀환운동 단체인 ‘화태억류귀환한국인회’를 결성했다. 박노학의 다섯 식구가 생활하는 다다미 단칸방이 이 단체의 사무실이 됐다.  빈곤 속에서도 막노동과 야간 경비 등으로 번 돈을 관계 기관에 탄원서, 진정서를 제출하는 데 쓰며 적극적으로 귀환 운동을 전개했다.

 

 

사할린 동포의 편지 배달부

 

1945년 해방 이후, 사할린에 억류된 조선인 노동자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구소련 치하에서 장기간 고립됐다. 일본 제국의 패망과 함께 행정력은 사라졌고, 구소련의 통제는 강해졌으며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모국과의 연락은 사실상 단절됐다. 과정에서 수천 명의 조선인은 가족과 연락이 끊긴 채 수십 년을 보내야 했으며,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조차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박노학은 사할린 동포와 본국 가족을 연결하는 민간 전달자의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일본에 정착한 그는 사할린에 남겨진 지인들과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편지 속에는 ‘내 가족에게 이 편지를 꼭 전달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있었다. 당시 한국은 구소련과 미수교국이어서 사할린 동포는 한국의 가족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박노학이 사실상 유일한 중개자이자 전달자였다.

 

사할린 동포들 사이에 "박노학에게 부탁하면 가족을 찾아준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에게 수백 통의 편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편지는 삼각 구조 형태로 가족에게 전달됐다. 사할린 동포가 일본에 있는 박노학에게 편지를 보내고, 그는 이 편지를 다시 한국의 아들 박창규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아들은 주소지나 실제 거주지가 다른 경우 시청, 읍·면·동사무소 등을 직접 방문해 현재 사는 곳을 찾아 발송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편지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박창규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대응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박노학은 국내 활동가 한영상, 이두훈 등과 협력해 대구에 ‘화태억류교포귀환촉진회’(후일 ‘중소이산가족회’) 결성을 주도했다. 이 단체는 사할린 동포의 편지를 수신자에게 전달하고, 답신을 다시 박노학에게 보내주는 공식 채널이 됐으며, 단체 명의로 정부와 적십자사 등에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박노학은 단순히 우편으로만 편지를 전달한 것이 아니라, 국내로 일시 귀국하는 경우에는 사할린에서 받은 편지를 직접 한국의 가족들에게 전달했다. 그의 아들 박창규는 사전에 연락을 취해 해당 가족이 서울로 와서 박노학을 직접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고, 가족들은 전국 각지에서 박노학의 집으로 모여 남편, 아버지, 형제로부터 온 편지를 받아보고 그로부터 생생한 근황을 전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