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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이달의 재외동포 (박노학) |
박노학 (1914.6. ~ 1988.3.) 전 사할린억류귀환한국인회 회장 |
1914년 충북 충주시에서 태어난 박노학은 보통학교(현재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이발 기술을 익혀 이발관에 취업해 가족을 부양했다. 그러던 중 ‘어차피 한 집안에 남자 둘이면 한 사람은 징용을 가야 하니 갈 거면 빨리 지원하는 게 낫다’는 친구의 권유와 이발관 근무만으로는 경제적으로 곤궁해 ‘화태인조석유주식회사’ 노무자 선발에 응모했고, ‘동토의 땅’ 사할린으로 건너간다.
1943년 12월, 사할린 오도마리(현 코르사코프)에 발을 디딘 그는 한 탄광의 갱내 기계부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12시간 교대 근무와 감금에 가까운 숙소 생활, 부족한 식량과 임금 착취 속에서 극한의 노동을 견뎌야만 했다. 전쟁이 격화된 1945년에는 계약 만료와 무관하게 ‘전쟁 종료 시까지’ 조선인 노동자들의 귀환이 불허돼 계속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소식이 알려졌을 때, 사할린 동포들은 환호했지만 이들의 귀환은 이뤄지지 못했다. 사할린이 종전과 함께 구소련 영토로 편입되면서 당시 일본 국적이던 동포들이 무국적자가 돼 발이 묶인 것이다. 수많은 동포는 소련군의 통제로 귀국 길이 막히자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47년 사할린에서 일본인 여성과 결혼한 그는 1956년 일본과 구소련의 국교가 회복되자 사할린 잔류 일본인의 귀환이 추진되면서 한국인 남편의 동반 귀환이 허용돼 2년뒤 일본땅을 밟는다. 박노학은 당시 코르사코프항을 떠날 때 배웅하면서 “한일 양국 정부 에 귀환을 희망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전해달라”고 애원하던 동포들을 잊을 수가 없었고, 이를 평생의 과제로 삼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