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한국과 구소련은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 우편을 통한 서신 왕래가 불가능했다. 이에 회장은 일본에서 사할린 동포들의 편지를 받아 이를 다시 한국에 사는 장남 박창규 씨에게 보내 가족들에게 편지를 전달했다. 생사 확인, 가족의 근황, 귀환 희망 등의 내용이 담겨 있는 이들 편지 통이 기적 같은 소식이었다.

 

사할린 동포들 사이에서 “박노학에게 부탁하면 가족을 찾아준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편지의 숫자는 급격히 늘어났고, 30여년 동안 회장 부자(父子) 전달한 편지는 3 여통에 달한다.

 

회장은 또한 1960년대 중반부터 사할린 동포들의 국적·지역·귀국 희망 형태 등을 기록한 이른바‘박노학 명부’를 만들었다.

 

7천명이 수록된 명부는 사할린 동포의 귀환 의지를 공식적으로 집계한 최초의 기록물로, 한국과 일본, 구소련 3국의 사할린 동포 관련 외교 협상에서 중요한 증거 자료로 활용됐다.

 

또한 명부는 사할린 동포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역사적 사료이자 사할린 동포 영주귀국 대상자 등을 우선적으로 선별하고 입증하는 기준이 됐다.

 

그는 사할린 동포의 귀환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선 고국의 가족과 상봉을 위해 일본 정관계 인사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다방면에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의 정치인 등과 협력해 구소련 당국을 설득했고, 1984 사할린 동포 10명의 일본 방문과 가족 상봉을 최초로 성사시켰다. 이는 전후(戰後) 최초의 사할린 동포 공식 출국으로 귀환 운동의 물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