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 일본군이 미국 태평양 함대가 있는 진주만을 공습하자 한인들의 광복 의지와 일본인들과의 차별성을 대외적으로 천명하기 위해 쿠바 3 국민회 지방회를 대표하는 11 명으로 ‘재큐한족연합외교회’ 결성을 주도했다. 2 뒤에는 이를 발전시킨 ‘재큐한족단’을 범시켜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한편, 1920년대 임천택 지사는 김구 선생으로부터 임시정부가 재정난을 겪고 있다는 편지를 받고, 쿠바 한인들을 규합해 식구 수대로 숟가락씩을 모아 돈으로 자금을 마련하는 임시정부 독립운동 자금 지원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7년부터 1944년까지 1,289달러의 기금을 모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 납부했으며, 246달러를 모아 쿠바 아바나 소재 중국 은행을 통해 충칭(重慶) 임시정부 김구 선생에게 송금했다. 일주일에 겨우 2~3달러 남짓이었던 당시 한인들의 임금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금액이다.

 

  1929년에 일어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1930 한인 100 명과 함께 지지대회를 열고 특별후원금 100달러 모금해 조국으 송금하기도 했다.

 

  김구 선생은 이러한 쿠바 동포들의 독립자금 지원에 대해 “미국 본토와 하와이, 멕시코, 쿠바의 1만여 명의 동포는 비록 대다수가 노동자였지만 애국심은 강렬했다”고 ‘백범일지’에 기록했다.

 

또한 그는 민족 교육과 언론 활동을 통해 쿠바 한인 청년들의 민족 정체성 확립 쿠바 한인 이민사 독립운동사 기록에 매진했다.

 

  1925 쿠바 최초의 한인학교인 민성국어학교 교사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교장직을 맡아 수년간 한글, 역사, 문화를 가르치며 민족 교육과 차세대 한인의 정체성 함양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