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도산 안창호 인터체인지(IC)’ 지정 (2002)

홍명기는 안창호 선생의 주 활동지였던 리버사이드로 연결되는 LA 10번·110번 고속도로 IC를 ‘도산 안창호 IC’로 명명하는 사업을 제안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 협의와 주의회 결의를 통해 미국에서 가장 혼잡한 도로로 꼽히는 동 IC 4곳에 그가 후원한 도로 표지판이 설치됐고, 이로써 한인 위상이 한층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

 

③ 대한인국민회관 복원 (2003)

1909년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대한인국민회관’이 2003년 노후화로 철거 위기에 놓이자 복원사업회장을 맡아 보존 운동을 주도했다. 대한인국민회관은 1909년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활용됐던 역사적인 건물로, 이를 보존하기 위해 우선  사재를 털어 모범을 보이고, 동포 사회와 한국 정부의 후원을 이끌어내 총 70만 달러의 복원 기금을 마련했다. 이로 인해 대한인국민회관은 미주 독립운동 역사의 현장이자 한인 이민 역사 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3. 미주 한인사회 영향력 확대 지원

미주 한인 이민 역사, 한인사회 발전 방안 등에 관한 학술 연구의 필요성을 느낀 홍명기는 2018년 미국 내 최초로 한국인 이름이 붙여진 대학 산하 연구소인 UC 리버사이드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에 37만 달러를 내놨다. 이 연구소는 우리 정부와 대학 측이 각각 300만 달러, 미주동포사회 기부금 300만 달러를 모금해 2010년 문을 열었다. 구술 역사 기록, 도서 출판, 논문과 신문 기고 등의 활동을 통해 미주 한인 이민사 기록‧보존 및 미주 한인의 역할 연구 등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김영옥 (1919~2005)

 

191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독립운동가 김순권의 아들로 태어난 김영옥은 22살이 되던 1941 미 육군 장교 소위로 임관해 2차 세계대전에서 큰 활약을 펼쳤고,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제대했다. 하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자 자원 입대해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으로 와 대대장으로서 유엔군 3차 반격의 견인차 역할을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중 직접 고아원을 세워 전쟁고아들을 지원했다.

 

ㅇ 휴전 후에도 한국군 군사 고문 활동과 한국군 전시 동원 계획에 대한 개편 작업을 이끌며 국군 최초 미사일 부대 창설 등의 업적을 이뤘다. 김영옥은 1972년 육군 대령으로 전역 후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한인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등을 세우는 데 공헌하는 등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지원에 힘썼다. 이러한 김영옥의 업적을 기려 미국 로스앤젤레스 교육위원회는 2009 그의 이름을 딴 공립학교 ‘김영옥중학교’를 설립했고, 한국, 프랑스,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최고무공훈장을 받았다.